엔트로피 (Entropy: A New World View)

내용 자체보다 더 중요한건.
이게 1980년에 나온 책이라는것.

1980년에 출간되었으면
최소한 1970년대 중후반 현실을 기반으로 썼을테고..
그런데 현실 묘사가 지금이랑 똑같애 -_-;;;
달라진게 있다면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환경적인, 사회적인 면모들은 더 안드로메다고.

요약하자면.
지금처럼 무시무시하게 지구를 착취하다간 큰 화를 입을 것이야~~!

나는 철저하게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건 나 자신이고,
내가 죽으면 세상도 없는것이나 마찬가지다. 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자손을 남길 생각도 없으므로,
일단 내가 생존해 있을 동안만 지구가 버텨주면 된다.
(조카야 니 살 길은 니가 찾으렴 ㅡ_ㅡ;;; 나한테 허락받고 태어난것도 아니잖음?)

그런데 신기한건 이미 번식을 마친 or 번식 예정인 사람들을 보면
대개 나보다도 환경에 무심? 무지? 하다는것.
심지어 옆에서 침튀기며 정보를 줘도 무관심 or 그때만 그런가보다…

어째서? ㅡ_ㅡ???
나야 나 죽으면 땡이지만 늬들은 네놈 자식새끼에 그 자식새끼 계속 이어서 지구를 물려줘야 하잖음??
그런데 우째 온갖 공해/독성 물질을 공기, 바다, 땅에 뿜어내고,
한정된 자원을 미친듯이 쓰며
관광사업한답시고 몇천만년 걸려 다져진 자연을 뒤집어 엎는것임?

난 나 죽으면 땡인데 왜 지랄이냐구?
지금 늬들 하는 짓거리 보면 나 죽을때까지도 멀쩡히 못 버틸것 같아서 그런다!!!!

라며 그나마 젊고 기운있을땐 거품물고 지랄도 해봤으나.
이젠 그럴 기운도 읎어. ㄱ-

지랄해봐야 듣는것도 아니고.
어차피 들어처먹지도 않을거, 나름 평화로운(?) 결론을 내기로 했지.

남들이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식과 대대손손 이어질지도 모르는 모든 자식들을 사랑하는것보다
나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때문에 신경쓰일 뿐이라는거.

다른 이들이 잘못된게 아닌걸로.


제1부 세계관의 변화

역사가 쇠락해가는 과정의 순환이라는 생각은 사회질서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좋은 사회질서는 변화가 가장 적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세계관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이라는 개념은 설 자리가 없었다.

중세 전반에 걸쳐 서유럽을 지배했던 기독교적 역사관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다음 생을 향해 가는 중간과정으로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원죄’ 개념이다. 원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선할 여지조차 박탈당한다. 인간이 역사에 뭔가 변화를 가하는 것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중세 사람들은 신이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통제하는, 완벽하게 질서정연한 구조물로 세상을 파악했다. 기독교에서 신은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또는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신이었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목표도 없었고, 진보하려는 의지도 없었고 뭔가를 남기려는 열망도 없었다. 신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인간의 목표는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 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유기체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사회는 신이 이끄는 일종의 도덕적 생물체이고 그 안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계몽시대 이래 개인의 생존 의미와 목표는 오직 생산과 소비로 전락해버렸다. 인간의 필요와 열망, 꿈과 소망은 모두 물질적 이익의 추구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애덤스미스는 존 로크가 사회적 관계에서 도덕성을 제거해버린 것처럼 경제에서 도덕성을 제거해버렸다. 어떤 식으로든 경제에 도덕성을 강제하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의 법칙이 깨질 뿐이다.

더 많은 물질적 부가 축적될수록 세계는 더욱 질서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물질적 풍요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이 되며, 이 물질적 풍요는 결국 질서있는 세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이를 실천하는 도구다. 이것이 기계론적 패러다임의 주요 가설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 수학, 과학, 기술의 세계관, 유물과 진보의 세계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계관들은 이제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 세계관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에너지 환경이 빈사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제2부 엔트로피의 법칙

제3부 새로운 역사관의 틀로서의 엔트로피

‘정상상태’로 들어간 문명들은 세계를 폐쇄계로 파악했고, 따라서 이 세계는 자기들이 이미 꽉 채워놓았으며 따라서 도망갈 길이 없는 장소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에게 있어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제2의 천성이었던 것이다.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지나친 전문화는 종의 멸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어떤 종이 특정한 생태계 내에서 지나치게 전문화되면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즉 전환에 대비할 수 있는 융통성과 다양성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전문화되고 또 기존의 에너지 환경에 너무 익숙해져서 근본적으로 다른 에너지 환경으로 옮겨가는데 필요한 융통성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제4부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와 다가오는 엔트로피 분수령

제5부 엔트로피와 산업시대

인간과 기계는 기존의 가용한 에너지를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변환시킬 수 있을 뿐이며, 그 과정에서 ‘잠시 동안의 효용’을 만들어낼 뿐이다.

우리는 에너지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을 찬양한다. 그러나 에너지의 대량생산은 사실상 한정된 지구 자원을 더욱 빨리 소비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국민총생산이라는 개념은 국민총비용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자원은 소비될때마다 미래에는 쓸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아무도 후손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남앙있는 천연자원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전쟁준비는 인간활동중 가장 많은 엔트로피를 증대시키는 활동이다. 미사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뿐이다. 파괴를 위해 사용하거나 고물이 될때까지 보관하다가 폐기하는 것이다. 어느쪽이든 그 미사일을 만드는데 들어간 지구의 자원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후손들이 쓸 쟁기를 빼앗아 칼을 만들고 있는 꼴’이다.

정말 이상한 것은 입수가능한 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적어진다는 것이다. 결정을 내리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세상은 과거 어느때보다 혼란스러워 보인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정보과부하’라고 부른다.

‘죄수를 심하게 처벌하면 할수록 반사회적 행위와 폭력사건이 늘어난다.’ 곰곰히 생각한 후 간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증가한 폭력을 처벌하면 된다.’

제6부 새로운 세계관으로서의 엔트로피

미국이 전세계 자원의 2/3를 계속 소비하는 한 제3세계 사람들은 결코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생활수준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 자원의 대부분을 계속 먹어치우고 이 자원의 대부분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동안 제3세계 사람들은 끼니를 얻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면 우리는 남들에게 경제발전을 어떤 식으로 하라고 훈수할 권리가 없다. 전세계가 거대한 산업의 쓰레기통으로 변하는 것을 막는데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지금 당장 자진해서 우리의 물질적 부를 대폭 줄여야 한다.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제3세계 국가도 지난 수십년간 미국에 존재해온 물질적 풍요를 실현하겠다는 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식의 발전모델을 따르려 했다가는 참담한 실패를 맛볼 것이다. 전세계의 자원을 지금 당장 균등하게 재분배한다 하더라도 서양식의 발전을 실현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연구는 ‘진지하지 못한것’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동양의 종교가 에너지의 흐름을 최소화하고 무질서의 축적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반면 서양의 종교는 역사가 한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실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새로운 종교적 원리를 통합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세계와 역사를 순환과정으로 보는 동양종교와는 달리,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은 지구의 역사에 분명한 시작과 종말이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에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 접근방식은 생태계 파괴의 주 요인이 되었다. 내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현재의 물리적 세계는 무시당했고 착취당하기까지 했다. 진정 가치있는 것은 천상의 세계에서나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으로 구성된 이 세계는 저열하고 타락하고 무가치한 것이므로 경건한 생활을 하려는 사람과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다. 이 세계는 내세를 향해 가는 정거장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현세보다는 신의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서양을 지배해온 기독교 교리의 단점 중 하나는 창세기에 나오는 세계지배에 관한 것이다. … 이 ‘지배’라는 개념은 인간이 자연을 무자비하게 조작하고 착취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 교리의 근본적인 개혁이 시작되고 있다. 처음으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지배’의 개념을 재정의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엔트로피적 세계관에 어울리는 신학적 기반을 만들어내고 있다.

신은 하늘과 땅과 지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기 때문에 피조물들은 모두 중요하다. 신의 창조에는 목적과 질서가 있기 때문에 그 목적과 질서도 신의 피조물만큼이나 존중되어야 한다.

인류라는 종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지구에 대한 공격행위를 중지하고 자연의 질서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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