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우스 (Full House)

진화에 관한 책을 읽으려 했는데
3분의 1을 야구 얘기에 할애하신 굴드 옹 -ㅁ-!!!
야구 기록 얘기를 왜 하고 싶으셨는지, 무슨 얘기가 하고 싶으셨는지는 이해가 갔지만;;

도킨스 옹처럼 뜬금없이 이사람 저사람 실명으로 공격하고 독설을 퍼붓거나 갑자기 얘기가 이리저리 새는 일 없이 편안하게 읽히도록 쓴 글솜씨 덕에 재미없는 야구얘기도 그럭저럭 읽을만 하긴 했음.

결국 포인트는 이거.
“인간 늬들이 아무리 오만방자하게 굴어봐야 오른쪽 꼬리”


1부. 플라톤에서 다윈까지 우수성의 확산

이 그림들이 차례로 보여주는 육상 동물들의 등장 순서는 인간 중심적인 시각에서 본 지배의 변천사이지, 다양성의 변화에 대한 공정한 기록은 아니다. 양서류와 파충류가 육상을 지배하자 물고기는 사라져버린다. 좀 별난 한 무리의 어류가 미지의 새 환경을 개척했다고 해서, 지구 표면의 70%를 덮고 있는 바다를 여전히 어류가 점령하고 있었는데도, 이 그림들은 바다에서 어류 전체가 사라진것처럼 매도하고 있다.

과학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모든 혁신들은 종류는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절대적 확신이라는 인간의 오만을 차례로 뒤엎어 나간 것이다. – 프로이트

2부. 죽음과 말 – 변이의 중요성에 대하여

외견상의 방향성 또는 경향은 사실 한 시스템 안에서 변이의 정도가 축소되거나 확장된 부차적 결과이지 어떤 것이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여 간 결과가 아님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류가 생겨난다. 메이저리그의 평균 타율이 그렇게, 박테리아 형태가 유사 이래 지금까지 계속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시스템 내의 평균값은 언제나 일정하다. 방향성이란 그러한 시스템의 가장자리가 확장되거나 위축되는 변이의 한 극단에서 찾아낸 희귀한 대상에 근시안적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비롯된다.

소수의 생물들은 변이가 열려 있는 쪽으로만 계속 복잡성을 진화시켜 왔다. 그러나 최빈값은 유구한 생명의 역사 기간 내내 박테리아였다. 박테리아는 어떤 기준에 비추어보아도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물일 것이다.

분류는 결코 객관적으로 잘 구분되어 있는 세계를 명확한 범주들 안에 기계적으로 정돈하는 것이 아니다. 분류는 자연에 대한 인류의 결정이며, 자연의 근본 질서에 대한 인류의 개입이다. 분류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인류의 사고에 일어났던 개념적 혁명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객관적 자연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분류 시스템의 얼개를 통해서만 그것과 교감할 수 있다.

‘긍정적인 태도를 갖자’하는 운동이 생각지 않게 발휘하는 잔인성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이 운동은 개인적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면 깊은 곳에서 긍정적 사고를 불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식으로 교활하게 변질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성격과 기질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성격을 근본적으로 개조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도 그렇게 쉽게 고치지 못한다. 우리의 심장에 ‘긍정적 태도’라는 이름의 단추는 없으며, 그것을 한 번 누르기만 하면 당장 긍정적 사고가 효과를 발휘하게 하는 손가락도 없다.

3부. 4할 타자의 딜레마

4부. 생명의 역사는 진보가 아니다

변화의 역사를 ‘무엇인가’가 어디론가 움직여 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풀 하우스)에 걸쳐 일어나는 변이의 확장이나 위축으로 봐야 한다.

생명의 최소 복잡성의 왼쪽 벽 바로 옆에서 박테리아의 형태로 시작되었고 거의 40억년이 흐른 지금 그 생명은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장 복잡한 생물은 아마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정교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풀하우스의 이 미미한 오른쪽 꼬리는 생명체 전체를 근본적으로 정의하는데는 적당하지 않다. 한쪽 끝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는 꼬리를 다양한 복잡성을 가진 전체를 대표하는 특성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인류의 특이한 위치때문에 이 고리를 더 소중히 여겨서도 안된다.

구조적으로 한쪽이 벽으로 막혀 있는 선형적 운동계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무작위적 움직임은 그 벽의 시작점으로부터 계속 멀어져갈 수 밖에 없다. 술주정뱅이는 항상 도랑에 빠지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항상 도랑을 향해 움직여 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관습적인 방법에서는 자연선택이 왜 큰 크기를 선호하는지를 묻지만, 새로운 해석에서는 어째서 유독 작은 종이 대량 멸종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진화의 장을 열어 나가는 것이 어째서 항상 작은 크기의 종인지를 알아야 한다.

광합성을 기반으로 하는 지상 생물의 전형적인 생명 형태가 사실은 행성 지각의 표층에 사는 박테리아처럼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생명 현상에서 변형한 대단히 특수하고 기괴한 것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우주의 보편적 생명 형태를 대표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명백백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그 누구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진리.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진리만큼 폭력적인 지적 독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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