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진화한다 (Freedom Evolves)

나의 자유는 정말 힘들게 진화했다. ㄱ-
이 책 읽으면서 중간에 읽은 다른 책 페이지수가 1000페이지가 넘음;;

책 중반부까지 배경 깔아주는 부분은 정말 읽기 힘들었는데
후반부에선 정말로 하고자 하는 주제로 다가가면서 점점 수월해진다.

딱히 매끄럽다고는 봐줄수 없는 번역도 읽기 힘든데 한 몫 한듯.
(못읽겠다고 집어던질 수준은 아니지만)

특히 관심이 갔던 몇가지.
벤이기주의, 외주를 주고 퇴화하는 인지능력,
탐욕스러운자들이 지배하는 ESS에서 공평한 자들이 대세가 되는 ESS로 변해가는 과정 등.

벤이기주의

“이타주의. 라는것은 결국 순수히 타인을 위한것이 아니라,
타인을 돕는 행동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자신을 돕는다. 라는 것.
그리고 이런것을 ‘벤이기주의’라고 부릅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스멀스멀 올라온 과거의 기억.

아마 중학교 윤리시간에 “이타주의”에 대해서 배울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순수한 ‘이타주의’라는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했었다.

나의 요지는.
“겉으로 보기에 자신에겐 도움이 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만 도움이 되는듯한 행위도
결국 따지고 보면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인 경우가 많으며,
비록 그것이 그런 계산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일지라도
결국 그 사람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다’
다시 말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행동’이므로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것이 아닌 남을 위한 행동’이라는
이타주의의 정의에 부합할 수 없다.”

이따위 얘기를 중학생의 언어로 선생한테 제기했었더랬다.
선생의 반응은?
“남들 도와주는 다른 사람들을 그딴식으로 깎아내려면 좋냐?”

ㄱ- 그래…
선생들이 그렇지 뭐. 뭘 바라겠어.
25년 지났는데. 이보셔들. 발전들좀 하셨나?

퇴화하는 인지능력

가축은 야생일때 필요하던 인지능력을 인간에게 외주줌으로해서
그다~지 똑똑할 필요가 없어졌다. – 멍청해졌다. -_-;

에또… 이걸 보고는 대개 금방 생각하는 부분이
컴터와 맛폰에 의지하는 현대인들!
요즘 흔히 말하는 “디지털 치매”일텐데
난 이 “디지털 치매”라고 부르는 부분이 어이없는것이..

전화번호는 애초에 못외웠고 -_-;
==> 수첩 잃어버리면 가족 전번 빼고는 전부 실종;
길은 애초에 못찾았고!!!
==> 처음 가보거나 두세번 가본 곳은 30분 일찍 가봐야 함.
내가 혼자 찾아가게 두느니 자기가 데리러 나오는게 빠르다는것을 모두들 금방 알아차림
계산따위 어차피 못했고!!!

일상이 치매 인생에서 날 구원해주신 “아이폰님!!!”
그대가 있기에 난 모르는 곳을 혼자 가도 두렵지 않소!

그니까 ㄱ- 내가 치매라고 자랑하는건 아니고;;;
뇌 기능을 선사시대 사람들이 쓰던 그대로 써야 되는건가?

디지털 치매?
시각 장애인의 시각 정보 처리 뇌 영역이 다른 역할을 하도록 재편되듯이
주변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뇌 활용 방법의 재구성이라고 봅니다만?

공평한 자들이 대세가 되는 ESS로의 진화

이거 정말 납득이 가는 설명.
탐욕스러운 소수와 그렇지 않은 다수가 ESS를 이룬다. 라는거야 많이 접한 생각이지만
그 아이디어를 이렇게 풀어놓으니 와… 진짜 있어보이면서 납득이 팍팍 간다.

많이 가지게 된 탐욕스러운 소수가 풀어놓은
“우리가 많이 갖는것이 정의다” 밈.
“그게 아니잖아”라고 깨닫게 된 탐욕스럽지 않은 자들이 퍼뜨려가는
“다같이 공평하게 갖는것이 정의다” 밈.

이것이 ‘정의’의 진화. ‘밈’의 교체.

왠지 이런거 알게되었다고 자랑하고 싶은 기분.


1장 본연의 자유

우리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우리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우리는 그런 특별한 성분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우리 각자는 정신이 없는 로봇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 말고 물질적이지 않으며 로봇도 아닌 성분 따위는 전혀 없다. 사람 사이의 차이는 모두 각자의 독특한 로봇 팀들이 일생동안 성장하고 경험하면서 통합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자유의지는 실재하지만, 그것은 중력의 법칙처럼 우리 존재보다 앞서 존재하는 특징이 아니다. 또 그것은 전통이 선언하는 식의, 물질세계의 인과관계로부터 벗어한 신과 같은 힘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활동과 신념이 진화한 산물이며, 음악과 돈 같은 인간의 다른 산물들만큼 현실적이다.

내 기본 관점은 자연주의다. 철학적 탐구가 자연과학의 탐구보다 우월하거나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 추구 활동과 협력 관계에 있으며, 여기서 철학자가 할 일은 때때로 충돌하는 관점들을 규명하고 하나의 우주관으로 통합하는 것이라는 개념이다.

자유의지에 관한 우려가 유물론 전반, 특히 신다윈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반감의 배후에 있는 추진력이라는 확신

2장 결정론을 다룰 사유 도구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의 과거 사실들을 얼마나 많이 모으든 간에, 논리적으로 자신이 A집합의 우주에 살고 있다는 것을 결코 증명할 수는 없다.

미래가 과거와 같으리라는 것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는 흄의 불길한 깨달음을 염두에 두면서도 우리는 어떤 규칙성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이고 우리가 규칙성이 죽 나타나다가 엉망이 됨으로써 실망시키는 기이한 우주에 살고 있지 않다는 엄청나지만 유혹적인 내기를 할 수 있다.

Conway’s Game of Life

자유롭지 않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것이 그보다 더 자유를 지닐 수는 없다는, 즉 전체가 부분보다 더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말이 당연해 보이지만, 결정론에 대한 저항의 뼈대인 이 직감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착각임이 들어날 것이다.

3장 결정론에 관한 생각

4장 자유지상주의를 위한 청문회

결정론이 참이라면 어느 순간에 물리적으로 가능한 미래는 정확히 하나뿐이며, 따라서 각 선택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모든 삶은 그저 시간의 여명기에 고정된 대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5장 그 모든 설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는 동물 세계에서 자주 접하는 좌우명이다. 한 예로 가축의 뇌는 가장 가까운 야생 친척의 뇌보다 상당히 작다. … 가축은 어리석어도 될 여유가 있으며 그래도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다. 자신들의 인지적 세부 과제의 상당 부분을 다른 종, 즉 우리에게 사실상 외주를 주었기 때문이다.

6장 열린 정신의 진화

7장 도덕 행위자의 진화

벤이기주의

상당한 크기의 집단에서 처벌은 협력의 진화를 허용한다. – Boyd and Richerson, 1992

오랜 세월 사상가들이 인식했듯이, 빅 브라더가 지켜보고 있을 때 협력하는 것이 합리적인 이유를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늘 지켜보며 어디에나 있는 신 – 국지적인 이득에 보상을 하기보다는 사후에 처벌을 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품을 정도로 운이 좋은 사회는 동료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을 때에도 신이 요구하는 것을 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시민들이 사는 사회일 것이다. 이 신화가 출현하고 융성하기 위해서 이 이론적 근거를 이해하는 지적 창작자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유념하자. (…) 신에 대한 두려움에 토대를 둔 ‘도덕’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고귀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이 유용한 비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혹은 아예 존재한 적이 없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가? 구성원들이 협력이라는 견고한 습성을 진화시킬 방법이 없지 않았을까?

프랭크에 따르면, 진화하는 동안 우리는 너무 합리적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마찬가지로 중요한 사항인데- 너무 합리적이라는 평판을 듣지 않도록 하는 과제에 알맞게 감정을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프랭크는 우리를 유혹과 위협에 그토록 취약하게 만드는 것, 마피아 대부가 말하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그토록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 근시안적, 즉 국지적 합리성의 불필요한 과잉이라고 주장한다. 진정으로 책임 있는 행위자, 선량한 시민이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그런 제안에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8장 당신은 무지한가?

지금까지 살았던 종들은 대부분 ‘정신적’ 인과관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자기 관찰을 위한 정교한 능력은 진화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원인은 누군가에게 관찰될 필요 없이 은밀하게 잘 작동하며, 다른 데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뇌에서도 그 말은 옳다. 따라서 동물의 식별 기구가 아무리 ‘인지적’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행동의 선택을 일으킬 그들의 출력 능력은 어느 무엇이나 누군가의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막연한 정교함이라는 상황-행동 연결들의 꾸러미는 단순한 생물의 신경계에 거주하면서 더 높은 수준의 감독 없이 그 생물이 필요로 하는 많은 일에 봉사할 수 있다.

9장 스스로 자유를 얻다

한 다형 ESS를 채택한 집단을 상상해보자. 이 게임에서 탐욕스러운 행위자들이 계속 성공을 거두려면 소심한 행위자들이 공정한 돌연변이들과 상호작용을 피하게끔 부추겨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집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규범과 다소 비슷한 정의 규범을 진화시킨다고 예상할 것이다. 이 규범은 소심한 자가 본분을 지키고 탐욕스러운 자에게 양보를 해야 한다는 개념과 ‘정의’를 연관지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의 많은 인간 사회들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친숙한 규범일 것이다. 이 행위자들이 적절히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없거나, 그것에 담긴 의미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널리 퍼뜨릴 수 없다면, 집단은 그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ESS평형상태에 있다. 하지만 이 행위자들이 약간이라도 경제성을 따질 수 있고 기본적인 다윈주의적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 뛰어난 상상력을 요하는 것은 전혀 없다 – 모두가 공정한 사람이 되는 ESS가 (a) (경제적 관점에서) 더 효율적이며 (b)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평형 경로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처음에 집단의 대부분은 모두가 공정한 사람이 되는 ESS라는 개념이 자연적 도덕에 충격적으로 위배됨을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소심한 자들 중 극소수는 (a)의 인식에서 자신이 착취당한다는 개념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개념적 유연성이 더 큰 존재라면 누구나 그 추론 단계로 나아가려 시도할 것이다. 설령 여론을 좇아 그 결론을 포기한다해도 말이다. 하지만 박해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밈의 전파를 도울 것이다. 계몽된 소심한 자들은 서로를 알 수만 있다면 조용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쉽게 반역을 꾀할 수 있다. 단지 서로 공정한 사람이 되는 전략을 쓰기만 하면 된다. 그럼으로써 그 거래로부터 더 큰 것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공정한 돌연변이’가 출현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말 그대로 유전적 변덕을 뜻할 필요는 없다. 공정한 인간 밈이 소심한 자의 정신에 머물때마다, 우리는 돌연변이를 갖게 된다.

우리가 심사숙고하는 과정에서 떠올린 모든 착상들의 표상들과 함께 자연적 동기의 막연한 근거를 포착하고 그것을 표현하면, 우리는 더 이상 자연선택이라는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이고 무심한 시행착오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는 순수한 복제력의 평형을 상호 설득이라는 공동 활동에 종사하는 합리적인 행위자들의 반성적인 평형으로 대체한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방향이 불분명한 시행착오에서 지적 (재)설계로의 이런 전환은 내 생각에 좋든 나쁘든간에, 말 그대로 꿈조차 꾸지 못했던 기회의 차원들을 여는 진화사의 주요 전환점이 될 듯하다.

우리의 실패는 사실 자유의 실패, 우리에게 던져진 삶의 기회와 위기에 반응하고 싶어할 때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실패 사례다. 그런 이유로 그것들은 불길하다. 그것이 사실 원할 가치가 있는 다양한 자유의지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유용성을 아는 인공 보철물들-문명 생활의 매력-에 기꺼이 의지하지만, 타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시샘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군비경쟁임을 일단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만을 보는 절대론, 즉 우리가 완벽하게 합리적이거나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고 보는 견해를 반박할 수 있다. 그 절대론이 우리의 합리성이 보는 방향에 따라 아주 좋게 보일지라도 사실은 착각이라는 것을 과학이 바야흐로 드러내려하고 있다는 편집증적 두려움을 부추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과학의 접근을 막겠다고 약속하는 모든 교리, 즉 우리 정신이 신성불가침하고 신비스럽다는 교리에 그럴싸한 매력을 부여한다.

그(알프레드 멜레)는 기본 책임 원리 (Default Responsibility Principle)를 제안한다. 당신이 A라는 상태에 있는 것이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면,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이 원리는 케인이 걱정하던 무한 회귀를 멋지게 끊어버린다. 그 원리는 세뇌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도록 해주지만 ‘사회’전체나 행위자가 없는 환경에서는 그렇게 못하게 한다. 선견지명이 있는 목적을 지닌 행위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당신을 조작했을 때에만, 당신은 자신의 몸이 한 행위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면제받는다.

10장 인간 자유의 미래

선하든 악하든 간에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인과적 설명이라는 산성 용액 속으로 던져 넣음으로써 칭찬할 것도 비난할 것도, 존중하고 존경하고 사랑할 것도 전혀 남지 않을때까지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자연과학의 이미지만큼 자유의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아니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 과학은 그렇게 비치는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부식성 개념의 접근을 막을 이런저런 장벽, 즉 절대적인 교리를 세우고자 시도한다. 그것은 지난 천 년의 잔재, 즉 운이 다한 전략이다.

나는 거세를 하나의 사례로 활용함으로써 독자들이게 ‘언어도단’의 제안에 이성을 끄고 ‘감정’의 소리를 크게 높여서 반응하라는 충동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생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것은 문제의 일부일 분이다. 자신을 파멸로 내려가는 버터 바른 미끄럼틀로 초대한다고 여겨서 그런 문제를 아예 생각할 엄두도 못낼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철학자들은 그런 압력을 초월하여 상아탑에 틀어박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을 냉철하게 사색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지지만, 그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사실 철학자들은 막연하게 상상하던 격변이 주목을 받기 전에 일찍 경고하는 척후병 노릇을 좀 즐기는 편이다.
거세는 유용한 사례다. 양쪽 옹호자들의 생각에 담긴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른 유혹을 받은 사람들의 의지력을 강화하거나 뒷받침하는 모든 첨단 제동장치들은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적절한 운동을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는 일을 할 수 없어서 식성이나 혈압을 조절하는데 도움을 줄 처방약을 열심히 찾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자제력을 함양하기 위해 무엇이든 간에 현재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책임있는 행위라면, 남들이 같은 정책을 펼친다고 어떻게 흉볼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생물의 피상적인 생물학적 특징이었던 것이 심리적 특징으로 변하고, 이어서 더 넓은 세상에서 정치적 특징이 된다.

자신의 한계점에 다다른 사람은 무너진다! 단지 똑같은 곤경에 처했음에도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무너진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고 처벌하는 것이 어떻게 공정할 수 있단 말인가?

Nicholas Maxwell은 자유를 ‘여러 상황에서 가치가 있는 것을 성취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God’이라는 단어처럼 ‘자유’라는 단어가 지닌 정서적 울림은 잘못된 움직임, 위협, 용인 같은 것은 무엇이든 공격하려고 나서는 파벌적 대증을 낳는다. 그럼으로써 전통이 대개 무임승차자나 그것에 가까운 존재를 지니는 결과가 나타난다. 전통의 승인을 받은 교리들은 가능한 한 꼬치꼬치 따지지 말아야 하며, 사람들은 그것을 전술적인 지혜의 문제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벌집을 들쑤시는 꼴 밖에 안될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유는 도전받지 않은 채 살아가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논박 불가능성이라는 그럴싸한 진주 피막으로 점점 두껍게 감싸인다.
나는 여러 사상가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이런 아주 신성하지만 허약한 전통들을 더 자연주의적인 토대로 대체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애써왔다. 결정론과 자유 사이에 가상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자 기적을 일으키는 자아나 영혼이라는 가짜 안전장치인 그런 존중받는 교리들을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에 그냥 놔두려니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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