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용이 특별하거나 하진 않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들 아는 얘기를 정리해 놓았을뿐.
제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듣고,
제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만 골라 만나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과정을 통해서 극단적인 생각들이 강화된다.
이게 간단한 요약이 되겠다.
중요한건 자신이, 속한 집단이 극단적인 성향을 띄고 있더라도
스스로 극단적이라는 자각은 없다는 것.
자신은 현실을 기반으로 지극히 합리적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
스스로를 ‘보수’라 착각하는 이들은 “아.. 그래서 저 빨갱이들이 저따위 지랄을 하는구나”라며 납득할 것이고
스스로를 ‘진보’라 착각하는 이들은 “아.. 그래서 저 꼰대들이 저따위 꼴통짓을 하는구나”라고 납득할 것이다.
그때 깨달은 건,
나의 생각이라는 것은. 결국 남의 의견에 바탕해서 나온 것이라는 점.
책, 논문, 신문을 읽고 미디어를 접하며 내 생각이 구축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 실제 사실관계를 따지기 위해 정보의 가장 밑바닥까지 뒤져보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를 알게 되는 과정은. 책과 TV, 인터넷 매체를 통한 뉴스와 사진.
내가 아프리카로 직접 아이들을 보고서 “아..애들이 굶네..” 이러는게 아니란 말이다.
나에게 (내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정보, 내가 보기로 결정한 정보,
내가 어울리도록 주어진 사람, 내가 어울리도록 결정한 사람,
내가 보도록 주어진 매체, 내가 보기로 결정한 매체를 통한
정보 수집이 이루어지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한 비합리적/합리적 판단을 하고
그 위에 내 판단이 이루어진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든다고 접하는 뉴스 하나하나마다 전부 내 몸으로 사실관계를 파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다.
내 몸이 하나인 이상, 수명이 100000년이라도 그건 불가능.
내가 할 수 있는것은, 가능한 한 여러 소스에서 정보를 얻고
당장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이라도 (역시 내가 가진 알량한 데이터 위에서) 타당성을 신중히 검토해 보는것. 그정도다.
.
65세가 넘은 우리집 어르신도 마찬가지다.
그분의 기준에 따르면, 이회창과 현 대통령 박근혜도 빨갱이란다.
대통령이 되기위해, 좌파들의 인기도 어떻게든 끌어보기 위해 좌파들의 의견에 영합했다며.
요즘것들은 세상을 멸망시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몹쓸 것들이며, 과거엔 세상이, 사람들이 이렇지 않았다.
오원춘을 비롯한 살인 강간범들이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 약한 형벌을 받는 것도 판사들이 몽땅 빨갱이들이라 그렇다.
65세.
사회를 움직여가는 주류의 물결에서는 일찌감치 밀려났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을 찾아갈 기운도, 건강도, 의지도 없다.
그저 과거의 영화와, 상처를 서로 햝아주며
현재의 처량한 상태와 현재 받고 있는 부당한 처우, 현실에 대한 울분을 나눌
비슷한 생각과 처지를 공유하는 친구들이 남았을 뿐.
그들이 모여 당구를 치고, 술자리를 하면서
“우리 아들 가게에 점원이 매일매일 출퇴근 하면서 애 둘 낳고 매우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
“지나가던 행인 1과 2를 봤는데 아무 멀쩡한 정신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듯 해”
이따위 얘기를 하고 있을 리가 없는 일이다.
그건 그냥 일상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와, 전사들이 똥싸러 가고, 빤쓰 갈아입는 일을 굳이 보여주지 않는것과 같은 이치다.
그냥. 언급할 이유도,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상.
‘정보’가 아닌 백그라운드.
화제가 되는 것은
“우리 아들 가게에 점원이 자꾸 지각한대. 우리땐 지각이 뭐야. 하루 24시간 일했는걸”
“지나가던 애새끼들 담배를 피우더라고. 말세야 말세.”
현실의 98%를 덮는, 정보성이 없는 일상이 아닌.
눈에 뜨인 2%가 화제거리가 되고 그것이 “정보”가 되며, “현실 인식의 기준”이 되며, “판단 기준”이 된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세상은 그들이 어깨를 펼쳤던 세상과는 다른 “말세”로 탈바꿈 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말세를 조장하고 있는 요즘것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는) 자식 자랑도 있겠으나,
그것은 매우 정상적인 나의 친구가 만들었기에 극히 드문 특수사례 -ㅅ-;;;
이것이.
내가 보는 ‘어버이 연합’을 비롯한 꼰대들의 형성과정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슬픈 과정이지만, 뭐 그건 그네들 인생 -_-;;;;
그들이 보기엔 난 또다른 극단 한쪽에서 춤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
‘나의 선호 범위 안에서’, ‘내가 견딜수 있는 한도 내의’
다양한 소스에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 뿐.
제1장 극단의 정체
제2장 극단화는 왜 일어나는가
정보의 힘
– 집단이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 정보의 영향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내세우는 주장에 쉽게 반응한다. 그리고 특정 방향을 지향하는 집단의 경우, 해당 집단 구성원들의 주장은 그 집단이 원래 흐르고 있는 방향으로 흐른다.
– 차이가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는 집단 구성원들이 접하는 정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확증의 힘
– 어떤 문제에 대해 확신이 없고, 어떻게 생각하는게 옳은지 자신감이 부족한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옳다는 자신감이 더 커진다. 이렇게 되면 보다 극단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믿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정보 교환과 확증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평판의 압력
– ‘사회비교론(social comparison)’에 따르면 사람들은 집단 내 다른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호의적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자신을 호의적으로 비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자기 입장을 주류적인 입장 쪽으로 약간 수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자기 생각보다 더 열렬히 주류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 다른 사람의 입장을 듣고 그것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 자기 입장을 그것에 맞춰 변화시키는 것이다.
– 집단의 구성원들, 특히 낮은 서열에 있는 구성원들은 다른 구성원들 대부분이 모르고, 자기만 아는 정보를 공개하기 꺼린다.. 나아가 그런 정보는 매우 신속하게 폐기해 버린다. 그 이유는 집단 내 다른 사람들이 거부하는 주장을 고집할 경우 집단이 자신에게 반감을 가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단극단화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가진 왜곡된 성향에 당당하게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집단이 ‘구조적 편향성 (systematic bias)’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러한 경향이 마치 공정한 정보가 모여서 도출된 것인양 받아들인다.
구성원들이 극단적인 경향을 가진 상태에서 확신에 찬 사람들이 집단을 지배하면 그 집단의 성향은 극단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러셀 하딘은 이런 경우에 극단주의자들은 ‘절름발이 인식(crippled epistemology)’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아주 미미한 수준의 정보를 습득한 다음, 그것으로 자신의 극단주의를 뒷받침하려고 드는 것을 말한다.
집단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유대감이 강한 경우에는 극단화가 더 심해진다.
집단 구성원들이 폭력 사용을 지지하는 쪽으로 움직이면서 열렬한 신봉자들만 남는 ‘자발적 분류 (voluntary sorting)’와 ‘자기 선택 (self selection)’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집단에 남는 사람들은 서로를 ‘제일 친한 친구, ‘가족 못지 않게 소중한 사람들’로 여기게 된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상황이다. 이렇게 구성된 집단에서는 애정과 연대감으로 뭉치고, 구성원끼리만 토의를 나누는 경향이 강한 극단주의자들이 활개를 친다.
편향동화 현상 (biased assimilation) 자신의 생각과 다른 글은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같은 주장은 현명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결국 자신의 기존 입장을 더 강화시킨다.
태도변화가 일어나는 티핑 포인트
– 새로운 정보나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관점을 바꾸는 경우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tipping point)
– 불가능해 보였던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 그것은 사람들이 가진 다양한 한계점 때문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생각이 일단 바뀌기 시작하면 그런 극적인 변화들이 갑자기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 선택 과정을 통해서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만 만난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이 자기들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말을 하고 그렇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취향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상당부분 형성되는데, 문화적 취향과 관련된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 판단이나 위험에 대한 태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회적 폭포현상 (social cascades) 폭포현상이 일어나면 어떤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과 관점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산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신이 실제로 아는 정보를 근거로 판단을 내리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근거해 판단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믿음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에 근거한게 아니라 자신이 신뢰하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동조한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제3장 극단의 메커니즘
구성원들이 걱정거리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자유로운 공간’을 가지고,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극단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집단 구성원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그래서 ‘지율적인 행동을 할 공간’이 적으면 그들만의 토의를 가질 기회도 많지 않아 극단화로 저항의식이 증폭될 가능성이 훨씬 줄어든다.
심각한 형태의 민족적 증오심과 두려움이 민족화 과정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적 증오심이 사람들의 피에 섞여 있는 것은 아님을 거듭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오래 전에 일어났던 어떤 특별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현재 이루어지는 사회적 압력에 의한 것이고, 이러한 사회적 압력에는 집단극단화도 포함되어 있다.
집단극단화는 크게 보면 정보 교환의 산물이다.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도 자기가 속한 집단이 편향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구성원들이 접하는 정보가 제한적이고, 그들이 가진 동기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집단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보통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분노를 키우고, 행동에 나석기 때문이다.
제4장 극단주의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대통령이 정치적인 견제를 받지 않는게 불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행정부 안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손쓸 수 없을 정도의 극단으로 서로를 몰고 갈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행정부가 가장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은 대통령의 의중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 의중을 강화시키는 ‘라이벌이 아닌 사람들의 팀 (team of unrivals)’이 구려지는 경우였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 지도자의 행동이 면밀히 관찰되고, 조직이 하는 일을 외부인들이 계속 모니터하고 평가하면 그 조직의 성공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다양성과 반대 의견을 통해 집단 극단화로 인한 실책 유발 위험을 줄여준다면 그 조직의 성공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는 말이다.
실적이 우수한 기업들은 이사회에서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고, 반대 의견이 자연스럽게 제시되며, 어떤 문제라도 활발하게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이사회에서는 대립되는 의견이 서로 충돌하고, 도발적인 질문이 자유롭게 오간다.
제5장 착한 극단주의
정부는 공원과 길거리에서 시민들의 발언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허용할 의무가 있다. 설령 많은 시민들이 평온함과 한적함을 더 바라고 집으로 걸어가거나 근처 식품점에 가는 길에 시위자, 반체제 데모대와 마주치는 일이 불쾌하더라도 이러한 표현의 자유는 허용되어야 한다.
공공광장론과 부당한 극단주의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공광장론이 중요한 사회적 목적에 기여한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첫째로, 공공광장론은 광장에서 발언하는 사람이 이제껏 동질적 그룹 내에 갇혀서 활동해 온 여러 무리의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 공공광장론은 발언에 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한 시민들에게 다가갈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공공광장론은 권리라기 보다는 기회를 부여해 주는것이다.
둘째, 공공광장론은 말하는 이들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불만의 대상인 특정 사람이나 기관들에게 접근할 기회도 제공해준다. 그런 기회가 아니면 이 사람이 그런 불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세번째는 공공 광장론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사람과 관점에 노출될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공공광장론은 일종의 사회적 구조 (social architecture)인데, 높은 수준의 자기 고립에 빠져드는 토론 그룹에 맞서는 구조이다. 공공광장론은 통제된 상황에 반대하고 우연적인 상황을 장려한다. 이것은 계획적되지 않고, 예상되지 않으며, 취사선택하지 않은 다양한 만남을 보장한다. 이런 점에서 이것은 인식의 다양성 (cognitive diversity)을 증진시켜준다. 이는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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