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임상 일화집 수준의 책.
나온지 10년이나 지나서 딱히 새로운 내용은 없음.

아.. 근데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번역 문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의 지능을 갖춘 사람들을 지칭하는 올바른 용어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그게 “저능아”가 아닌건 확실하잖아?
계속 “저능아” “저능아” 해대는데 보는 내내 불편해서 혼났다.
번역자도 번역자지만 편집 및 검토 과정에 걸러내지 않았다는것도 황당하고.

저능-아低能兒: [명사]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

어느각도로 봐도 저건 비하하는 언어.


제1부 상실

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신을 잃ㅎ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정상인들은 마음속 어딘가에 속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잘 속아넘어간다. (인간은 속이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속는다) 음색을 속이고 교묘한 말솜씨를 발휘할 때 뇌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빼고 전부 다 속아 넘어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제2부 과잉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면서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이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진실한 이야기 혹은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디시 말하면 자기의 내적 세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를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것이다.

투렛 증후군 환자는 억제라는 정상적인 보호장벽, 다시 말해서 기질적으로 결정되는 정상적인 자아의 경계가 없다. 따라서 그들의 자아는 살아있는 한 언제나 공격에 노출된다. 내측과 외측에서 오는 충동에 휩쓸려 공격을 받는 것이다.

흄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흄의 생각대로라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각 혹은 지각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은 그저 계속해서 변화하기만 하는 감각의 집합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다. 그러나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처럼 불안정한 존재의 경우에는 흄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제3부 이행

제4부 단순함의 세계

이러한 환자들은 지능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는데도 간단한 동작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걷지도 못하는 환자도 있다. 이러한 절차백치증이나 운동백치증의 경우, 일반적인 재활 치료는 효과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도 음악에 맞추기만 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진다. 바로 이 점이 노동요가 생긴 까닭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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