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The Life You Can Save)

음… 이런책인줄은 정말 몰랐다.
상당히 극단적인 시각의 기부 옹호주의자의 글.

주장을 펼치는 전제 부터가 나와는 거꾸로인데다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으로만 가득 차있지만
“나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더라도 일단 내 손에 닿았으면 그 주장을 들어는 보자. 혹시 내가 몰랐던 사실들과 생각지 못했던 납득당할 논리가 있을수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어는 봤으나… 결과는 역시나 ㅡ_ㅡ…;;
설득당하지 아니하였음. 이다.


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봤다.
잘 차려입고 출근길에 나서고 있는데, 아이를 구한다면 옷과 머리를 버리고 회사에는 지각할 것이다.
아이에게는 위험한 수심이지만 어른인 나에게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아이를 구할 것인가? 구해야 하는가?

라는 화두로 논리를 전개한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아이를 구한다라고 대답할 것.
구하지 않으면 “아이가 죽는다 (죽을 수 있다)”라는 상황을 인지했고,
아이의 생명에 비해 내가 잃을것은 사소하기때문에 구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이 상황을 아프리카를 비롯한 가난한 나라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아프리카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생명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혹은 개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위 상황의 어린아이를 구하지 않는 것과 동등하게 비도덕적이고 나쁜 일이다.

바로 이것이 작가의 논리.

그러나 나의 논리는 정 반대로 작동한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물론 아이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프리카 등지의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죽어가는지 꽤나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해 거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지 않겠다” 라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회사에 지각하여 인사고과를 깎일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아이를 외면하고 그대로 출근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나에게는 그 사람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갑자기 희귀병에 걸려, 그에 대한 치료를 하려면 500억원이 필요하다고 치자.
물론 나에겐 500억은 고사하고 5000만원도… 쿨럭;;;
그럼 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500억원이 있으면서도 내놓지 않는 재벌들을 증오하면서 죽어가야 마땅한가?

액수를 대폭 줄여보자. 50억원으로.
내 친척중엔 50억원을 지출한다고 해서 생계에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 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50억원을 나에게 쾌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비도덕적이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는가?

그 50억원을 그냥 땅에 묻어두기로 결정하든,
요트를 사서 해외 일주를 하면서 여생을 사치스럽게 보내기로 결정하든,
그들의 손자에게 남김없이 상속하기로 결정하든,
나에게 주기로 결정하든. 그들 맘일 뿐이다. 그들의 재산일 뿐.
 
 
바로 같은 논리로 난 매끼 식당에서 나오는 식사중 일부를 양심의 가책 없이 남긴다.
애초에 몸무게 40Kg을 갓 넘기는 내가 성인남자 기준으로 나오는 식사를 전부 다 먹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도덕적인 인간이기 위해서 그 음식을 꾸역꾸역 다 먹어야 마땅한가?
사람따라 양을 구별하지 않고 1인당 식사량을 똑같이 주는 식당 주인을 힘차게 비난해야 하는가?
내가 남긴 음식으로 생명을 부지할수 있었을 아프리카 아이들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워야 마땅한가?
과체중, 비만인 사람을 보면 굶는 아프리카 아이들이 있는데 돼지처럼 처먹고 듸룩듸룩 찐 모양새를 보라며 경멸의 눈길을 보내야 마땅한가?

내가 하고 있는것, 할 용의가 있는것은
먹지 않을 공기밥을 반납하기. 내손으로 직접 떠온 반찬은 다 먹기. 딱 이정도까지다.
 
 
사람은. 내 손에 난 작은 상처가 지구 반대편의 모르는 사람이 잃은 손보다 중요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손에 상처가 나면 빨간약과 반창고를 구매하게 되지,
그 빨간약과 반창고를 살 돈으로 콜레라 백신을 구매하여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의 수를 생각하면서
기부하러 달려가게 되지는 않게 된다.

냉정하고 냉혹할지라도 그게 일반적이다.
일반적이기 않기로 결정하는것은 개인의 선택일 뿐.
물론 이 책의 작가처럼 타인도 그렇게 되길 열심히 설득하는것도 개인의 선택이다 자유다.
그게 나를, 사람들을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낙인찍지는 못한다.

Dr. House가 말했듯이, 공평한 것을 원한다면 picked wrong planet, wrong species에 태어났을 뿐.
이게 내 생각.

뭐… 이런 생각들이 철저하게 냉혹하고 비도덕적이라고 간주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 역시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일 터.

 
 
작가가 한 부분에 테러리스트를 고문하여 대도시 한복판에 핵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그 테러리스트를 고문하는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잭 바우어가 떠오르는건 어쩔수 읎…-_-;;)
이 부분 하나만 가지고도 아마 어느것이 도덕적인가에 대한 논박이 붙으면 아마 대박일듯?

작가가 치켜올리는 Henry Spira라는 사람은 초반엔 못가진 사람들을 위해,
후반엔 동물 권익을 위해 헌신했는데 이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지 않은지?
누군가는 동물에 쓸 돈이 있으면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하는것이 도덕적이라며 핏대를 세울텐데?
 
 
도덕이란게. 어느정도까지는 일반론이 적용되는지 몰라도
사람따라 다 다르기 마련이고 그 어느것도 남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법.

작가의 주장대로 박물관에서 어마어마하게 비싼 오래된 그림을 사는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부터
아프리카에서 애들이 굶어죽던 말던 일단 예술 가치가 높은 그림부터 복원하고 보살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까지
다양한 가치관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그 모든 스펙트럼이 반영되어 다양성을 갖춘 세상이 구현되는것.

“노숙자들이 굶어죽으면 안되니 당장 먹을 끼니를 해결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노숙자들이 한끼 먹을 식량을 계속 줘봐야 평생 노숙자 신세다. 장기적인 재활 정책을 주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두가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기에
노숙자들이 오늘 한끼를 굶지 않고 내일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이며
자립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제한적이나마)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인간보다는 동물에 헌신하는 쪽에,
누군가는 환경보호를 하는 쪽에,
누군가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에
누군가는 내 주변 손 닿는 곳을 보살피는 것에 기쁨을 느끼기에
세상이 나름대로 굴러가는것 아닐까?

온 세상 사람들이 똑같은 가치관에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ㅡ_…..

뭐…. 그런것.


전반적으로 OECD의 원조액 전체에서 약 4분의 1정도만이 세계 최빈국에게 갔다.
원조의 총액수가 과장된 인상을 주는 두번째 이유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몇몇 국가들은 대외 원조로 그들이 만든 물품을 사도록 했으며, 따라서 자체 경제는 부흥시키면서 원조의 효과는 떨어뜨렸다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어, 미 의회는 미국 정부기관이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해 콘돔을 제공할때 반드시 미국에서 만든 콘돔을 구입해 기부하도록 못박았다. 미제 콘돔은 아시아제에 비해 가격이 두배나 되는데도 말이다. …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대략 20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식량원조에서도 법에 따라 미국에서 자라난 식품만 써야 하고 대부분의 경우 미국 배를 이용해 수송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 농민들이 농산품을 좋은 가격에 팔 수 있게 하고, 미국 해운회사들에게도 호경기를 선물해준다. 하지만 식량이 필요한 그 인근지역에서 곡물을 구입한다면 식품 구입비가 훨씬 적게 들 뿐 아니라 해운 비용과 그 밖의 추가 비용도 필요 없고, 식량을 배급하는데 4개월여나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더 고약한 점은 보조금을 받은 다량의 농산물이 수입되면 지역 시장이 죽게 되며, 개발도상국 농민들이 생산성을 강화할 인센티브를 잃어버린다는 점일 것이다.

– ‘인구 성장이 급속한 가난한 나라에는 원조를 하지 말자’라는 주장은 빈곤을 줄일 경우 출생률도 낮아진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 나라가 산업화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출생률이 떨어진다.
– 교육 역시 출생률을 줄이는데, 특히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질때 그렇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학교에 다니지 않은 여성이 평균 여섯명의 자식을 둔다. 그들이 대부분 살아남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인구 증가의 압박이 될 것이다. 적어도 중등 교육 과정이라도 이수한 여성은 평균 두 아이를 둔다.

예술이나 문화 활동에 기부하는 일은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도덕적으로 모호한 행동이다. 2004년,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중세 이탈리아의 화가인 Duccio가 그린 작은 성모자상을 구입하는데 무려 4천5백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그 그림을 구입함으로써, 메트로폴리탄은 그곳을 방문해서 명작을 관람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명작들에 또 하나를 보탰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에는 단돈 50달러가 없어서 백내장 수술을 못 받고 그림은 물론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90만명이나 있다. 그 그림 한장의 구입비만 있으면 백내장 환자들 전원이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어떻게 그림 한 장이, 아무리 아름답고 역사적 중요성이 있기로, 그만한 가치를 가진단 말인가?

고문은 언제나 잘못이라는 기본적인 주장을 생각해보자. 경찰과 간수들이 죄수들을 마구 대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고문으로 쓸모있는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낮음을 감안하면, 이 원칙은 최선의 결과를 낳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직 테러범을 고문해야만 뉴욕 한복판에 핵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를 고문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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