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예찬 (50 Voices of Disbelief: Why We Are Atheists)

이 주제에 대해서 할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ㅎㅎ
종교를 가진 사람, 종교 자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당연하고.

종교적인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국에 살고 있다면 밤이 되면 무덤처럼 변하는 십자가밭과
지하철, 공공장소에서 불신지옥을 외치는 그들에게 질려버리며 짜증스런 관심을 보내게 마련.

현재 ‘신’에 대한 나의 태도는 있든지 말든지 I don’t give a damn.
‘종교’에 대한 나의 태도는. 남의사 종교가 있든지 말든지.
나만 안건드리면 ㅇㅋ

근데 남의 일에 사사건건 참견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특정 종교가 있다지 아마…


 

나도 종교와 전혀 연관없는 삶을 산건 아니니..
할머니가 성당을 다녀서 나도 성당에 등록당했다.
심지어!! 가톨릭 세례명도 있다.
울 엄뉘도 아부지와 결혼할때 할머니가 성당에 등록시켰는데,
아부지는 성당에 안다닌다는것이 함정.

엄뉘도 열성신도는 아니고, 몇주에 한번씩 간간이 성당에 가는 정도.

교회 잡설 – 첫번째

어린이 시절 – 성당, 천주교

할머니가 입회(?)시킨 엄마와 동생과 함께 성당에 매주는 아니더라도 꽤 자주 다녔다.
당시 내 관념속의 신, 혹은 하느님이란.
“바다 건너 저~쪽엔 미국이란 곳이 있어.” –> 내가 본적은 없지만 있다니까 있는줄 안다.
“우리를 사랑해주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있어.” –> ㅇㅇ ㅇㅋ

딱히 성당가기 너~~~~무 싫었던 기억은 없다.
단지. 보고싶은 주말 낮 만화, 영화를 못보는것.
어린이는 기도할때 어른처럼 대충 깍지를 끼면 안되고
그림속의 천사처럼 두손 곱게 모아 앉아있어야 한다며 계속해서 내 손을 억지로 합장시키던 어떤 아줌마.
대체 니가 뭔데 내 주말 시간을 지배할 권리를 가지겠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교리 공부 담당 선생님들 (아마 대학생들이었겠지..) 정도가 나를 짜증나게 했을뿐.

아.. 또 있구나.
그다~지 내 생각에 큰 잘못을 한것은 없는것 같아서
억지로 억지로 ‘늦잠을 잤다’거나 류의 사소한 것을 고해성사로 말했더니
신부님이 버럭! 화를 내면서 “매주일 미사 나왔어?”
“아…아뇨;;”
“그럼 그걸 왜 말안해! 미사 안오는것이 죄인데! 대죄!!”
10살쯤 먹었을때인듯 한데.. 그 말을 듣고 매우 어이없었던 기억이 있다.
역시 난 종교적인 싹수는 어릴때부터 없었던듯.

어린이 시절 – 교회, 개신교 part1

5살무렵 어린 시절부터 난 교회 -개신교- 옆에 살았다.
문자 그대로 옆집. 교회와 우리집은 담을 공유한 옆집 사이.

교회건물에서 창문을 열어놓으면 그 안에서 나는 소리가 아주 생생하게 다 들렸다.
그런데;;;
저녁 시간에 자주 교회에서 미친듯이 싸우는듯한,
여러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몇년간 계속되었다.

나는 무서워 떨고. 동생은 무서워 울고.
부모님은 그때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교회에 전화하고 찾아가서 싸우고.
그래도 소용없던.

그땐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서 자초지동을 들어서 이해할 수 있을 무렵
엄뉘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려주셨다.

교회에서 신도들 여러명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기도를 시킨단다.
(왜 한꺼번에 여러명에게 시키냐. 게다가 마이크까지 들고. 변태 새끼들..)
처음에는 보통 목소리로 시작하는데 그렇게 한꺼번에 여러명이 기도를 하면
다른 사람보다 자기 기도가 잘 안들리는것 같으니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게 되고,
나름 기도를 하고 있으니 거기에 몰입해서 울부짖는 소리를 내고
여러사람이 마이크에 대고 한꺼번에 점점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있으니
사정을 모르고 밖에서 듣는 (강제로 듣게 되는) 사람 입장에선
미친 사람들이 매일 목숨걸고 싸우는 소리로 들린거였다는…

그리고 엄뉘, 아부지가 (그리고 당시 바로 옆집에 딸 셋과 살고 있던 고모, 고모부가)
창문을 닫던지, 마이크를 쓰지 말고 기도를 하라고
입이 닳도록 말을 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들은 그때까지도 그 미친 비명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정말 농담 아닌데.
지금도 그 미친 비명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린이 시절 – 교회, 개신교 part2

교회와 우리집은 담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담 바로 옆에 있는것이 교회소속 유치원의 놀.이.터.

나의 인식 범위 안에서 그 놀이터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놀이터였고,
미취학 아동이 집 담벼락에 매달려서 다른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신세.
하지만 놀이터쪽으로의 담 높이는 어른이 뛰어내리는것도 불가능할 정도.

어느날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놀이터에 잠입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나나, 놀이터로 들어가는 길 알아!
”잠겨있지 않을까?
”잠겨있으면 도로 나오면 되지!
밤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곳이라는 두려움,
들어가다 들키면 혼날거라는데 대한 두려움 따위는 날아가버리고.
동네 아이들과 교회/놀이터에 불법침입에 성공 +_+!!!

왜인지(수업시간이었겠지 -_-;) 유치원 아이들이 전혀 나와있지 않던 놀이터에서
정신없이 뛰어놀길 얼마였던가.
교회 집사에게 들켜버렸다.
뭐… 애들이 보통 시끄럽게 놀았겠나;;

거기서 놀고있던 한무리의 꼬꼬마들.
실내로 끌려들어가 호통을 들었다.
한참을 경을 친것중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대목.
“너희들 놀이터에서 놀고 신발에 모래 묻혀가지고 나가면, 그 모래 다 돈주고 산건데!!
그 모래 한 알갱이라도 묻혀 나가면 돈으로 물어내야돼!!
모래 묻혀가면 도둑이야! 다 털어!!”
돈으로 물어내야된다.는 말에 우리는 하나같이 쫄아서 신발을 뒤집어 미친듯이 바닥에 털어댔고.
그리고도 신발에 모래 한개도 안 묻은게 확실하냐며 다시 한참을 호통.

아 ㅅㅂ… 그래 너 교회 집사 할 자격있다.
3년이 더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구나. 집사님아.

이렇게.
개신교 교회와 나의 인생의 시작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당연히 내 인식세계 안에서는
“개신교 교회” = “미친 색키들” 의 공식이 자연스럽게 고착되었다.

제1부 믿을 수가 없군!

―논리적으로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

악과 나 – Gregory Benford
신이 제시하는 거래 중의 일부는 유혹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나치게 유혹적인지도 모른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영생을 거절할 수 있을까? 낙원에서 누리는 영생과 지상에서 겪는 고난을 바꾸지 않겠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있다. 무신론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 올라온 거래를 거부한다. 이는 영생이 나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겉보기와 다르게 그 거래가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생의 증거가 없다는 부련한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 나는 악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 세계의 한 가지 특징일 뿐이다.
> 우주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신이 그것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을 때 더 잘 이해된다.

대답 없는 기도 – Christine Overall
성서를 읽으면 우리는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인 예수가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편파적으로 대했다는 교훈을 얻을 것 같다. 사람들이 이처럼 편파적으로 처신한다면 아이들에게 경멸당했을 것이고, 또 경멸당하는게 마땅하다.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고 다스려지는 것이라면, 나는 신이 원래 인간들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도록 정해놓은 모양이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개입하든 개입하지 못하든 어떤 쪽으로든 신은 제멋대로이고, 편견이 심하며, 심지어 변덕스럽고 쩨쩨하다는 비난도 면할 수 없다.

신은 죽었는가, 아니면 사악한가?: 신의 도덕적 성격과 존재적 지위에 대한 성찰 – John Harris
누군가 ‘신의 존재에 대한 불가지론자가 아니라 왜 무신론자인가?’ 라는 질문을 하자 ‘누가 내 집 정원 땅속에 요정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데, 나는 그 점에 관해 불가지론자 라고 대답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조너선 밀러였지 싶다. 뭔가가 사실이라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없는 상황이라면,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는게 아니라,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이다.

무신론은 신이 없다는 확정된 확신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불가지론은 그 물음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태도다.

당신이 내게 두뇌를 주었고, 모든 증거가 당신의 존재에 반대하는데, 내가 달리 무슨 결론을 내릴 거라고 기대했습니까? – 버트런드 러셀

나의 무신론은 그들의 것보다 신 하나가 더 많을 뿐이다. – 리처드 도킨스

불신앙의 세 단계자신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을 때, 신은 진정한 이유를 알거라고 생각하면 막연하게나마 마음이 놓이는 면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내 행동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다.

아무 종교도 없다고 생각해보라 – Edgar Dahl
성직자들은 시급한 도덕적인 문제에 개입할 자격을 분명 갖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발언에는 뭔가 특이한 면이 있다. 종교적 발언은 세속적 발언보다 더 높은 권위자로 대접받겠다고 주장한다.

난 왜 유신론자가 아닌가? – Pravir Ghosh
당신이 뭔가가 잘못이거나 거짓이거나 존재하지 않는것을 알았는데도 다른 이유 때문에, 즉 거기에 투자된 관심이나 공공의 선이라는 명분때문에 여전히 그것을 지지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이성이 아니다. 그저 말 그대로 기회주의일 것이다.

약간 비합리적인 신앙은 그냥 가련한 평범한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안전하게 간직되어 있게 하자! 그가 달리 의지할 것도 없지 않나!

핵심 쟁점 – Ophelia Benson
신에 대한 지식은 각자의 소원에 딱 들어맞도록 깔끔하게 형성되었다. 내가 이긴것은 신이 선하기 때문이고, 지는 것은 신의 탓이 아니다. 내가 쓰나미에서 살아남으면 신은 선하고, 다른 사람들이 쓸려가거나 익사할 때는 그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추론 능력과 증거를 감안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우리를 탓할 권리는 그에게 없다. 그러니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우리 탓을 한다면, 그건 악질적인 소행이다.

제2부 생각 있는 사람들의 세계

―구원 대신 이성을 선택한 사람들

분명히 무신론자 – Julian Baggini
성서의 글자 하나하나까지 모두 참이라고 믿는 근본주의자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에 나가는 그리스도인의 절대다수는 신과 그리스도에 대해 자기들이 믿는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마법의 시각에서 종교를 보면? – James Randi
그저 사회의 일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사상과 교육을 검열한다는 무서운 현상인데, 이런 파괴적인 풍조가 종교 때문에 계속 발생했다.

제3부 신 없는 우주론

―초자연을 과학으로 바꾼 사람들

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유신론, 무신론, 과학 – Michael Shermer
… 986개의 다른 신이 가짜 신일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 회의주의 계통의 글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모든 사람은 이런 두번째 부류의 신들에 대해서는 무신론자다. 우리는 그저 무신론의 범주에 신 하나를 더 추가한 것일 뿐이다. 문화적인 무대에 이처럼 많은 신들이 나와 있으니, 십계의 첫 세 항목에서 보듯 야훼가 그토록 질투심이 많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 또는 지적 설계자 (Intelligent Designer)를 지극히 힘이 세고 정말로 영리한 외계 지성체 (Extra-Terrestiral Intelligence)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유신론자, 창조론자, 지적설계 이론가들이 기적과 무로부터의 창조 행위에 호소하는 지점에서, 그들의 탐사는 끝난다. 반대로 과학자들에게는 그런 수수께끼와 문제를 확인하는 것이 시작에 불과하다. 과학은 신학이 떠난 곳에서 시작한다.

양면적인 무신앙 – Taner Edis
무신앙은 과학적·철학적 논쟁보다는 도덕적 확신에서 동기를 얻는 경우가 많다.

신이 보낸 신호가 아니라 진화적 소음 – Athena Andreadis
책임을 포기하고 그저 지시만 따르고 싶은 유혹은 매우 크다. 부모 같은 존재가 모든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 역시 크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구약성서의 야훼까지도 자기 머릿속에 혼자 있는것, 그리고 인간 진화의 특정한 상황이 지시하는 돌이킬 수 없는 제약보다는 낫다고 여겨진다.

내면의 신 – Micheal R. Rose, Jay Phelan
인간이 존재하는 곳 어디에서든 일부 사람들은 종교적 경험을 겪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도덕적 가치 때문에 고생한다. 어떤 형태든 영적인 생활을 갖지 않은 문화는 없다. 이 사실은 하나의 과학적 현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 이상의 확인 가능한 실체, 때로는 사악하지만 대개는 우호적인 존재들이 거주하는 영적 영역과의 접촉을 진짜로 경험하는가?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좋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불분명한: 신에 대한 믿음의 인지적 결함들 – Thomas W. Clark천체 물리학적 탐구를 해나가면서 우리가 어떤 super-being의 종족이 관찰할 수 있는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별 수 없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비교조주의자다. 그 존재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이론이 그 상황에서 최고 수준의 것인 한 자잘한 존재론적 부스러기들이야 어디에 떨어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 진행되는 탐구로 인한 긴장감 속에서 그런 이론들이 자주 바뀔 때, 존재하는 것에 관한 우리의 견해가 잘못으로 판명될 권리를 앞다투어 확보하려 할 뿐이다.

객관성이 내세우는 모든 주장이 피할 수 없이 직면하는 요구는 사물이 실제로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그것이 어떤 것이었으면 하고 우리가 원하는 바로부터 최대한 차단해야 한다.

제4부 믿음과 억견을 넘어서

―종교의 폭력성을 거부하는 사람들

아이들을 협박하는 종교 – Emma Tom무신론자들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한구너씩 들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서는 집 주인들에게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성서를 버리고 우주적 무관심의 세계와 영원한 무의 교단에 들어오라고 전도한다면 어떨까?
다행히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마오쩌뚱이 아닌 일반 무신론자들은 대부분 자기식대로 살고, 또 타인들도 그냥 그대로 살게 내버려두는 쪽을 훨씬 좋아한다.

학교에 온 헤즈볼라 – Maryam Namazie
‘모욕당한 모슬렘 감성’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국가 권력과 그 변호자들의 후원을 받아 사회 전반에서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고 제약하며 비판을 사전에 금지하려는 강력한 정치적 운동이 사용하는 선전 구호다. 특정한 표현과 발언이 한도를 넘어섰다고 규제하는 것은 사회의 억압을 위한 도구다. 발언과 표현이 이슬람의 감성을 모욕한다는 주장은 실제로는 그것을 통제하려는 시도다.

믿음과 억견을 넘어서 – Demien Broderick
우리 불쌍한 인간들이 언제라도 속임수에 잘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줄 증거는 충분하다. 나는 인간이 감정적이고 인지적 혼란에 쉽게 얽히는 방식을 보여주는 가장 으뜸가는 보기가 종교라고 생각한다.

나의 비종교적 생활: 미신에서 합리주의로 가는 여정 – Peter Tatchell바로 지금도, 종교적 근본주의의 부흥은 세계적으로 인권에 대한 가장 큰 위협 가운데 하나다.

성직자들의 위협과 검열과 반대로 종교 사상 및 모든 사상은 비판과 검토에 열려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그 외 다른 신앙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그런 종교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부류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무지와 공포가 신을 창조해냈음을 알게될 것이다. 그 환상, 열광, 기만이 신들의 외관을 꾸미거나 변형시켰다. 그들을 숭배하는 것은 허약하기 때문이다. 속기 쉬운 성질 때문에 그들이 보존된다. 관습, 존경심, 독재는 그것들을 지원한다. – 돌바흐 남작, The System of Nature, 1770

신앙을 갖지 않을 이유들 – Sheila A. M. McLean
고리타분한 이야기이지만, 인간이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분열적인 것 중 하나가 종교라는 말은 진실이다.

인간적인 자기 결단, 생의학적 진보 그리고 신 – Udo Schuklenk
‘영혼이 들어온’ 이후 임신이 지속되는 동안 임신부는 자기 신체의 소유자이기를 멈춘다. 정말로 충실하게 재생산 도구로 환원되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가톨릭 계통의 병원들은 배아를 구조하기 위해 임산부의 삶을 희생시킬 태세가 된다. 가톨릭의 조직적 그리스도교에서는 배아가 실제 인간보다 더 중요하다. 나는 조직된 그리스도교가 어째서 출산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어른 여성의 삶을 없애는것을 정당화하는지 한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모슬렘 여성들은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많다. 안전하게 아이를 낳기 위한 의학적 절차에 따라 곧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남편들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있는 신의 대리인들이 우리 일에 조금이라도 개입하면, 여성들은 임신 기간에 자기들 신체에 대해 거의 어떤 통제력도 갖지 못한다.

제5부 신은 필요 없어

―지금 여기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

누가 불행한가? – Lori Lipman Brown
나는 태어나기 전의 무한한 시간동안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적이 없었다. 또 내가 죽은 뒤의 무한한 시간 동안 내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통탄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나와 내 정부에 강요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잘 지낼 수 있다.

나는 왜 신자가 아닌가? – Anthony C. Grayling
우리는 자신이 왜 신자가 아닌지를 설명하면서 종교적 변증론자들이 주장의 토대로 삼는 것들과 유년기에 받은 세뇌와 자기기만, 생각하기를 꺼리는 성향, 권위에 대한 욕구, 사회적 압력, 취약성과 공포의 심리학적 기원을 검토해나갈 수 있다. 그런 특징들은 종교가 신도를 모집하기 위해 의지하는 토양이다.
데이비드 흄은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성서의 시대가 되자 기적의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틀렸다. 성서의 이야기를 계속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니 말이다.

도덕성에는 왜 종교가 필요 없을까? – Peter Singer, Marc Hauser
우리는 선조로부터 도덕적 직관을 한 다발 물려받았는데, 추정하건대 그것은 우리가 사회적 포유류로 진화해온 수백만년의 세월동안 살아남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우리에게 쓸모가 있지만, 다른 것들은 급변하는 우리 세계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중의 어느것이 바뀌어야 하는지 가려내는 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불신앙을 넘어서 – Philip Kitcher
종교의 사회학적 연구를 보면 종교들이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입 회원들에게 교조적인 진리를 설득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심리학적인 필요를 맞춰주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창조가 이루어지던 순간에 허약하고 유한한 우리 생물들이 개입할 수 있었더라면, 그 지혜롭다는 창조주에게 매우 뻔하지만 귀중한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도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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