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 지식의 대통합 (Consilience)

I had experienced the Ionian Enchantment. It means a belief in the unity of the sciences—a conviction, far deeper than a mere working proposition, that the world is orderly and can be explained by a small number of laws.

과학이란 얼마나 미천한 학문인가!

대학. 교양과목. 이라는 것을 들어야 했다.
필수과목이야 학교에서 정해주는대로 듣는거고.
선택교양.



 

우리 학교는 인문캠퍼스와 이공계 캠퍼스가 약간 떨어져 있는데
빡빡한 공대 시간표상 교양과목을 들으러 인문캠퍼스쪽으로 총알같이 뛰어가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런데 마침 이공계 캠퍼스 쪽에 ‘논리학’이라는 교양과목을 개설해주는것이 아닌가!
장소도 이공계 캠퍼스. 게다가 논리학!

‘논리’, LOGIC.
여기에 약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스스로도 강한 분야라고 생각했기에
주변 아이들을 꼬셔서 수강신청.

헐……
그런데 이건 뭐지….?
철학과 교수인지 강사인지가 와서는 첫시간부터 역설하는것은
과학, 공학이 인문학에 비하여 얼마나 미천하고 벌레같은 학문인가.
이것 한가지.

벌레만도 못한것들을 가르치러 귀한 한몸을 무려 이공계 캠퍼스까지 행차하신
교수님은 중간고사 보는 시기까지 매 시간,
한가지 주제로만 강의를 했다.
‘철학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에 비하여 과학은 얼마나 미천한 쓰레기인가’
거기에 대한 연설이 끝나고나면 조교가 실제 ‘논리학’에 관한 프린트물을 돌리고 문제를 풀게했다.
그리고 난 그냥 그 과목 듣기를 포기했다.

Alexander Rosenberg와 같은 과이면서,
자신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대상을 밟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이 찌질하고 오만한 교수님 덕에
나의 마음에도 그에 반하여 인문학과 철학을 은근히 경시하는 마음이 생겨났던게 사실이다.
(오…철학과에서는 연구비랍시고 받아서 저딴 인간을 키우나보지? 라며)

 
과학,공학자는 인문학을 보며 탁상공론이나 하는 오만한 열폭 찌질이들.
인문쪽에서는 과학, 공학을 두고 속물적인 아랫것들.
이렇게 서로 깔보는 시각이 있는것 같더라..

이 상황에 통섭이라니 ㅎㅎ
서로의 분야가 자기 분야와 동등하게 중요하다. 라는 점을 인정하는게 먼저일듯.


1장 이오니아의 마법

나는 이오니아의 마법에 걸린 것이다. 이 표현은 물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Gerald Holton이 처음으로 쓴 말로서 통합 과학에 대한 과학자들의 믿음을 뜻한다. 즉 세계는 질서 정연하며 몇몇 자연 법칙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단지 그럴지도 모른다는 식의 가정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확신이다. 이런 확신의 뿌리는 기원전 6세기의 이오니아에 살았던 Thales of Miletus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은 우주의 섭리를 설명하고 인간을 우주에서 중요한 존재로 부각시키려는 최초의 글쓰기였는지도 모른다. 아마 과학도 이와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연장선 위에 있을 것이다. 다만 과학은 기존 종교와 달리 수많은 시험들을 견뎌낸 탄탄한 근거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해방되고 확장된 종교이다.

2장 학문의 거대한 가지들

인간 지성의 가장 위대한 과업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해보려는 노력이다. 지식의 계속적인 파편화와 그것으로 인한 철학의 혼란은 실제 세계의 반영이라기 보다는 학자들이 만든 인공물일뿐이다.

귀납의 통섭은 하나의 사실 집합으로부터 얻어진 하나의 귀납이 다른 사실 집합으로부터 얻어진 또 하나의 귀납과 부합할 때 일어난다. 이러한 통섭은 귀납이 사용된 그 이론이 과연 참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시험이다. – 윌리엄 휴얼

저명한 철학자인 Alexander Rosenberg는 최근 철학이 단지 두 가지 질문만을 다룬다고 주장했다. 그중 하나는 과학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이 왜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없는가에 관한 것이다.

3장 계몽사상

계몽사상
그들을 이끈 것은 발견의 전율이었다. 그들은 질서 정연하고 이해 가능한 우주를 드러내어 자유롭고 논리적인 사고력의 토대를 구축하는 과학의 힘에 동조했다.

마음은 처음 본 대상을 재빨리 흡수하고 저장하기 때문에 나머지 다른 과정이 어디에서 시작되든 실수는 계속해서 퍼지고 교정되지 않은 채로 지속된다. – Frances Bacon

‘인간의 이해는 건조한 빛이 아니다. 오히려 의지와 감정이 주입되어야만 ‘과학이라 부를 만한’ 과학으로 발전한다.’ – Frances Bacon
그는 감정의 프리즘을 갖다 댄다고 실제 세계에 대한 지각이 왜곡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실재는 직접적으로 포착되고 있는 그대로 기록된다. 그러나 실재는 발견되었을 때와 거의 똑같은 생생함과 감정의 표현을 지닌 방식으로 잘 전달된다.

4장 자연과학

과학 이론은 반례들에 직면하면 폐기되도록 특별히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왕 틀린 것이라면 빨리 폐기될수록 좋다. ‘실수는 빨리 할수록 좋다’ 라는 격언은 과학적 실천에서도 하나의 규칙이다.

– 과학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이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첫째 기준은 반복 가능성이다.
– 진정한 자연과학은 이론과 증거로 꽉 맞물려 있으며 근대 문명의 기술적 진보에 근간이 되어 왔다는 점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이비 과학은 개인의 심리적 필요는 충족시킬 수 있으나 기술 발달과는 아무런 관련이없다.

다음은 환원주의의 일반적인 작동 방식이다. 마치 사용자 매뉴얼을 보는 듯할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그 체계 주변을 여행하도록 해라. 그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라. 그 질문을 잠시 내려놓고 그것이 함축하는 요소들과 물음들을 시각화하라. 대안적 해답들도 고려하라. 어느 정도의 증거들로 명료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 해답들을 말로 표현하라. 만일 너무 많은 개념적 난점들이 발생하면 뒤로 물러서라. 그리고 다른 질문을 찾아라. 마침내 우리가 파고들 수 있을 만큼 약한 지점을 찾으면 결정적인 실험을 가장 쉽게 수행할 수 있는 모형 체계를 찾아라. 예컨대 입자물리학에서는 그런 체계가 통제된 복사 현상일 것이고 유전학에서는 번식 속도가 빠른 개체일 것이다. 그 체계를 완전히 숙지하라. 아니, 그 체계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세부 사항을 사랑하고 그것에 대한 감을 익혀라.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질문에 대한 답이 수긍이 가도록 실험을 설계하라. 새로운 질문과 새로운 체계에도 적용해 볼 수 있도록 그 결과를 활용하라. 다른 사람들이 이런 절차에서 이미 얼마나 멀리 앞서 나아갔는지를 검토해 보고(앞서간 사람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어떤 지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지를 결정하라.

대체로 이런 식의 절차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환원주의가 과학의 일차적이고 핵심적인 활동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분해와 분석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와 의미에 관한 철학적 반성을 통해 종합과 통합의 능력을 단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생산적인 과학자가 되려면 어느 정도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 새로운 발상들은 널려 있지만 대부분은 틀리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대부분의 번득 떠오르는 착상은 그 어느곳으로도 우리를 안내해 주지 못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과학자들은 인생의 절반을 일에 바친다. 살아남은 통찰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은 대부분 지루하며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만 영락없이 부정적이거나 (최악의 경우) 애매한 결과만을 남긴다.

독창적인 발견이 전부이다. 철학자 Alfred North Whitehead는 과학자들이 알기 위해서 발견한다기보다는 발견하기 위해 안다고 말했다. 그들은 알 필요가 있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새로운 발견이 일어나는 첨단 분야로 신속히 이동하려다 보니 어떤 때에는 다른 것들은 거의 모른 채 그냥 지나치는 경우들도 생긴다.

물론 인문학자들도 발견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독창적이고 가치있는 작업은 대개 이미 존재하는 지식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다. 만일 어떤 과학자가 의미를 조사하기 위해 지식을 분류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는 인문학자로 분류된다. 이것은 특히 발견의 주변부에 머무르면서 그 지식을 보유할때 더욱 그렇다. 과학자의 생명은 그 자신만의 과학적 발견이 있는가에 달려있다.

단일 나선 분리와 이중 나선의 재형성
1958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Matthew Meselson과 Franklin Stahl은 DNA분자가 어떤 단계를 거치며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의 이중 나선이 풀리면서 2개의 나선이 만들어지고 각 나선이 새로운 짝을 만나 2개의 새로운 이중 나선이 만들어진다.

계몽사상이 낭만주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두가지 형편없는 이유가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낭만주의자라서 신화와 도그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를 과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말이다.

창조적 사고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뚜렷이 구분짓는 특성은
(1) 창조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모호하게 정의된 문제 진술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점진적으로 구조화하며
(2) 상당한 기간 동안을 그 문제들에 천착하고
(3) 그 문제들과 관련되거나 잠재적으로 관련된 분야들에 대한 배경 지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Herbert Simon
요컨대 창조적 사고를 위해서는 박학, 강박관념 그리고 대담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5장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하나의 현상을 그 요소들로 분해하는 작업은 세포를 소기관으로 소기관을 다시 분자로 분해하는 경우처럼 환원을 통한 통섭으로 간주된다. 반면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 특히 환원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자연이 그것을 처음에 어떻게 조립했는지를 예측하는 일은 종합을 통한 통섭이다.

생물학 분야들 간의 통합은 이 장의 처음에 언급된 미로의 딜레마때문에 아직은 요원하다. 분야들 간의 통섭은 상향식보다는 하향식일때, 예를 들어 아마링고의 뇌에서 그것의 구성요소인 원자로 나아갈때 좀 더 부드럽게 일어난다. 하지만 반대 방향의 통섭, 즉 일반적인 것에서 더 특수한 것으로의 통섭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이를테면 아마링고를 종합하는 것보다 그를 분석하는게 훨 씬 쉽다는 말이다.
흔히 전일론적 접근이라고도 부르는 종합을 통한 통섭은 조직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면서 복잡성이 엄청난 비율로 증가한다는 복병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많은 생물학자들이 흔히 빠지는 실수는 자신의 모델로 정답이 산출되었다고 해서 그 답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절차들과 동일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혼돈의 가장자리 – edge of chaos

생물학에 관한 참된 이론을 갖게 될 것이다.
첫째, 모든 분자와 원자를 일일이 시뮬레이션해 보지 않고도 살아 있는 개체를 완벽하게 재편할 수 있는 일반적 조직 원리가 존재하는가? 둘째, 이 동일한 원리가 마음과 행동 그리고 생태계에도 적용될 것인가? 셋째, 물리학과 수학의 관계처럼 생물학의 자연 언어로 기능할 만한 수학이 존재하는가? 넷째, 올바른 원리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원하는 모델에 그 원리를 적용하려면 얼마나 상세한 사실 정보가 필요한가?

6장 마음

지식의 통일성 – 미로의 실재 – 에 대한 믿음은 궁극적으로 모든 정신 과정이 물리적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그 과정이 자연과학에 잘 부합한다는 가설에 근거해 있다. 마음(mind)은 우리가 알고 있으며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창조된 장소이다.

진화와 정신에 관한 경험적 연구들을 통해 우리가 배운 분명한 사실은 뇌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도록 조립된 게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조립된 하나의 기계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뇌과학자들은 마음에 연관된 요소들 – 뉴런, 신경전달 물질, 호르몬 -의 근본 속성들은 이미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뉴런 회로의 창발적·전일적 속성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회로가 지각과 지식을 창조하도록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자유의지란 의식적 마음을 구성하는 시나리오들 간의 경쟁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이다. 우세한 시나리오들은 감정 회로들을 환기시킴으로써 공상이 일어나는 동안에 그 회로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시나리오들은 마음 전반을 활기차게 만들고 집중시키며 몸이 특정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자아는 그런 선택을 하는 듯이 보이는 존재자이다.

7장 유전자에서 문화까지

대중 지식인들과 그들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대중 매체의 전문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통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를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겨 왔으며 자연과학과 사회 행동이나 정체성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거의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자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은 인간사와는 동떨어진 좁은 칸막이에만 갇혀 지냈기 때문에 인간본성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는 소양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을 통합하고 문화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과학 문화와 인문학 문화 간의 경계를 국경으로 보지 않고 양쪽의 협동 작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미개척지로 보는 방법뿐디아. 오해는 미개척지를 무시할 때 발생하는 것이지 정신 구조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문화는 유전자, 문화 공진와의 부분으로서 각 세대 구성원 개인의 마음속에서 집합적으로 재구성된다. 구전 전통이 글쓰기와 예술을 통해 증보되면 문화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고 세대를 건너 뛸 수도 있다. 그러나 후성 규칙이 주는 영향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인 것이며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하게 유지된다.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의미기억(semantic memory) – Endel Tulving
일화기억은 사람을 비롯한 다른 구체적 대상들에 대한 과거의 직접 지각(perception)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마치 영화 속의 이미지를 더올리는 것과 같다. 반면 의미기억은 대상과 개념을 다른 대상과 개념에 연결시킴으로써 의미 (meaning)를 상기시킨다. 이런 경우에 그 의미가 그 대상과 개념의 이미지를 통해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이미지를 표시하는 기호를 통해 연결될 수도 있다. 물론 의미 기억은 일화들 내에서 비롯되며 거의 언제나 뇌가 다른 일화들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뇌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한 종류의 일화를 기호를 통해 표상하는 개념으로 집약하는 강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위와 같이 두 유형의 기억을 염두에 두고 문화의 단위를 찾아보자. 우선 개념을 의미 기억의 연결점(node)또는 참조점으로 간주해야 한다.

유전자의 규정을 받는 후성 규칙들은 문화적 습득과 전달을 가능케 하는 감각 지각과 정신발달의 규칙성이다.
문화는 어떤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달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돕는다.
성공적인 새 유전자는 개체군의 후성 규칙을 변화시킨다.
변화된 후성규칙은 문화적 습득이 이뤄지는 경로의 방향과 효율성을 변화시킨다.

8장 인간 본성의 적응도

인간본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본성을 규정하는 유전자도 아니고 인간 본성의 궁극적 산물인 문화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막 그것에 대한 정확한 표현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후성규칙들이다. 즉 문화의 진화를 한쪽으로 편향시켜 유전자와 문화를 연결해주는 정신발달의 유전적 규칙성이다.

인간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의 기본적인 진화원리
> 혈연 선택 (kin selection)
> 양육 선택 (parental investment)
> 짝짓기 전략 (mating strategy)
> 지위 (status)
> 계약적 합의 (contractual agreement)

웨스터마크 효과
웨스터마크 효과는 다른 배들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사회 규범이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가? 근친상간 금기는 도덕성의 진화에 대해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 정통 사회 이론에 따르면 도덕성은 대체로 양식과 관습으로부터 구성된 의무 규약이다. 하지만 웨스터마크는 기존의 윤리학에 대해 도덕개념이 선천적인 감정에서 도출된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도대체 합리적 선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안적인 정신적 시나리오들을 궁리해 보다가 최강의 후성 규칙을 만족시키는 시나리오를 문득 찾게 되는 그런 것이리라! 인류가 수십만년 동안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하게 된 것도 이런 규칙들 그리고 그 규칙들의 상대적 힘의 위계 때문이다. 이런 근친상간 회피 현상은 유전자, 문화의 공진화의 한 가지 사례로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사례는 유전자, 문화 공진화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 행동의 전반까지 엮어내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9장 사회과학

물론 사회과학에도 진보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 공유와 낙관적 전망이 부족한 상태에서 훨씬 더 천천히 진행된다. 협력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부진하다. 심지어 진짜 발견이 이뤄져도 비정한 이데올로기 싸움때문에 빛이 바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의 경우 인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정치학자는 서로를 이해하지도 격려하지도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과학자 전체는 인간 본성의 토대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으며 그 본성의 뿌리 깊은 기원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회과학은 강력한 역사적 전례의 잔재에 발목이 잡혀 있다. 사회과학의 창시자들은 고의적으로 자연과학을 무시하는 전략을 취해 왔다.

문화나 유전이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성을 통합해 주는게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만일 윤리 기준들이 문화를 통해서 형성되는데 문화는 끝없이 다양하고 동등하다면 도대체 모든 근거로 신정(theodocy)이나 식민주의, 아동착취, 고문, 노예제도를 반대할 수 있겠는가?

후성설(epigenesis)은 개체가 유전과 환경의 공동 영향 아래에서 어떻게 발달하는지에 관한 개념으로서 원래 생물학에서 처음 나왔다. 그렇다면 후성 규칙들은 무엇인가? 감각체계와 뇌의 선천적 작용들의 집합체인 후성 규칙은 개체가 환경에서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빠른 해결책을 찾도록 만드는 일종의 어림법 (rule of thumb)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끔 선천적으로 규정하고 자동적으로 특정한 선택을 하게 한다.

경제를 비롯한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개인에서 집단 행동으로 번역하는 작업은 핵심적인 분석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 개인적 행동의 정확한 본성과 출처는 아직까지도 거의 고려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모형을 세우는 이론가들이 사용하는 지식은 대개 상식과 막연한 직관에 근거를 둔 통속심리학적 지식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지식의 유효기간은 이미 지나버렸다.

심리학과 생물학을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에 도입하는 일은 결국 효용성이라는 복잡미묘한 개념을 미시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이런 검토는 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어떤 특정한 선택으로 기우는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그런 선택을 하는가를 물음으로써 이뤄진다. 이런 작업의 너머에는 미시에서 거시로 이행하는 문제, 개인의 결정이 사회적 패턴으로 번역되는 여러 과정이 놓여있다.

10장 예술과 그 해석

유전자·문화의 공진화는 뇌의 진화와 예술의 기원의 기저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공진화는 뇌과학, 심리학 그리고 신화생물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과정이다. 물론 예술과 관련된 직접적 증거는 여전히 빈약하다. 그러나 뇌와 진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은 예술에 관한 조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과학의 본성이다. 이 불확실성 덕분에 과학과 인문학 간의 동맹이 훨씬 더 흥미로운 기획이 되었다.

생물학적 이해가 예술에 대한 학문적 해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떤 과학도 결코 창조적 예술을 가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심미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을 절묘하게 강화함으로써 인간 경험의 복잡한 세부 사실들을 전달하는 행위가 바로 예술의 독점적인 역할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왜 그런지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도 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느낌을 전달한다.

만약 예술이 정신적 발달의 선천성 규칙들의 조종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통적 역사뿐 아니라 유전적 진화의 최종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즉 유전적 지침(genetic guide)이 단순한 부산물이었을까, 아니면 생존과 번식을 직접적으로 향상시킨 적응(adaptation)이었을까?

예술은 지성이 야기한 혼돈에 질서를 부과할 필요성 때문에 탄생했다.

11장 윤리와 종교

윤리의 기원에 대한 수세기 동안의 논쟁은 다음과 같은 쟁점들로 귀착된다. 정의나 인간의 권리와 같은 윤리적 격률들이 인간의 경험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낸 창안물인가?

나는 종교가 인류의 정신에 엄청난 흡인력을 갖고 있고 종교적 확신이 대체로 유익하다는 점을 거리낌 없이 인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종교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번뇌들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망의 자양분이다. 사람들은 종교가 제공하는 확실성을 갈망한다. 신이 모든 인간의 삶 – 심지어 노예의 삶마저도 – 의 성스러움을 증언하면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왔다가 모든 이에게 영생을 약속하며 죽었다가 부활햇다는 기독교 교리보다 정서적으로 더 강력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 지상낙원이건 천국에서의 부활이건간에 미래의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은 사회적 실존에 있어서의 예속적 명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가 창안해 낸 약속된 보상이다.
– 이것은 사회적 유기체들의 생존에 필요한 하나의 장치로서 진화한 것이다.

내가 볼 때 헌신의 유형 중 가장 위험한 것은 기독교 특유의 신앙심이다. 즉 나는 이 세계에 속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제2의 삶을 기다리며 고통 – 특히 타인들의 고통 – 쯤은 감내할 수 있게 해 주고, 자연환경은 다 써버려도 된다는 망상을 심어주며, 신앙의 적들은 잔인하게 다뤄도 좋다고 도닥여 주고, 자살에 가까운 순교를 칭송하게 만든다.

과학은 인류의 조직화된 객관적 지식의 축적이며 서로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공통의 이해 속에서 통합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최초의 매개물이다. 과학은 특정 부족이나 종교를 편들지 않는다. 즉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전 지구적인 문화의 기반으로 작용한다.

윤리철학을 과학과 손잡게 만드는 논리가 종교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교는 초유기체(superorganism)에 비유된다. 종교도 생활사를 가진다. 그것은 태어나서 자라고 완성되고 번식하며 충분히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죽는다. 생활사의 각 단계에서 종교는 자신의 자양분이 되는 인간들을 반영한다.

12장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지혜의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우리는 아직 의지적인 진화의 시기에 들어서지 못햇지만, 그러한 전망에 관해 생각해 볼 만큼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 있다. 정말 자유로운 최초의 종인 호모 사피엔스는 우리를 만들어 낸 자연선택을 해제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 의지 바같에는 유전적 숙명도, 우리의 갈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별도 없다. 인간 본성과 인간 역량의 유전적 진보를 포함하는 진화는 이제부터 도덕적·정치적 결정으로 조절되는 과학 기술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우리는 곧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어떻게 되고 싶은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이 행성을 결단내기 전에 제대로 정착하여 행복해져야 한다. 진지한 고찰이 바로 앞에 닥친 수십 년을 나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는 정치경제학의 대안들 대부분이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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